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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보르,『스펙터클의 사회』서평 Marxism project

스펙터클의 사회

박경숙(서강대학교/문학부 인문계)

 

비슷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모두 똑같은 색안경을 낀 채 저 멀리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 이것은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한국판)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무엇을 그리도 넋 빠지게 구경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우리들의 삶의 결과물이자, 역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상품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 세계이다.

 

스펙터클

보통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여, 볼 만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를 선전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스펙터클 대()서사시류의 광고에서 말이다. 구수하고 달콤한 팝콘냄새가 풍기는 극장의 푹신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눈앞에서 감독이 친절하게 찍어서 보여주는 영화가 상영된다. 우리는 시선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2시간이면 어떤 이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고민과 그/그녀의 주변 사람들, 또 남몰래 흘리는 그/그녀의 눈물까지도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혹은 실제로 가보지도 못한 산과 바다의 풍광까지도 우리는 두루 섭렵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산다. 그에 대해 여기 이 쪽, 영화 스크린 반대 쪽, TV 브라운관 반대쪽을 우리는 실제 세계라고 부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드보르는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우리는 과연 세계에서 우리의 몸과 우리의 생각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실제로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드보르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스펙터클의 사회

드보르는 바로 이러한 스펙터클이라는 말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외양의 지배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삶의 진실, 삶의 진정한 모습들은 은폐되고, 우리의 눈앞을 이루고 있는 것은 표상과 허위의식일 뿐인 것이다. 이들은 결코 우리의 삶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별개의 거짓세계, 한갓된 관조의 대상으로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이러한 표상과 이미지들에 매개되고 있다. 서로의 삶을 마주하지 못한 채. 그렇다면 이러한 겉껍질을 벗겨내면 되는 것인가?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스펙터클은 단지 우리의 사회, 우리의 세계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 경제가 사회의 모든 부문을 지배하게 된 오늘날, 이 세계를 이루는 주체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현대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펼쳐지는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스펙터클주의적이라는 것이 드보르의 분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우리 자신과 분리된, 그러면서도 현실세계의 중심에 존재하는 스펙터클에 대하여 부정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진정한 삶의 출발점, 삶의 자리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결국 각자의 주어진 자리에서 편파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계를 스펙터클은 허위적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스펙터클을 관조하면서, 그로부터 삶의 질서와 긍정성을 주입 받고 있는 것이다. 혁명적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 바로 이러한 꿈과 환상의 세계에 스펙터클적 현실은 그 막대한 힘을 가지고 우리의 눈을 가리고서 존재한다. 이렇듯 총체성과 통일성에 은폐되어 있는 이 세계의 분리, 분열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사회적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누가 이러한 현실을 용감하게 부정하고 나서겠는가? 스펙터클적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듯 분리는 세계의 근본에서부터,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완성되어 있다. 물론 표지 그림에서처럼 우리는 모두 같이 살아 숨쉬고 있다. 게다가 옷차림과 표정, 생각, 행동 모두가 동질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적 공존과 외면적 동질성이 우리에게 진정한 관계를 보증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커다란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구경꾼에 불과하며, 우리 구경꾼들을 단지 구경꾼으로서 같이 존재케 하는 것은 결국 스펙터클적 현실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적 관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분리된 상태 그대로 재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스펙터클적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현실의 수용을 강요 받아 왔다면, 그 반대편에 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스펙터클이 은폐하고 있는 이 사회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란 무엇인가? 현대산업은 기존의 생활 필수품의 범위를 계속해서 넓혀나가고 있다. 우리는 산업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수요자가 될 것을 요구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자를 소외시킴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던 현대산업은, 스펙터클이라는 기제를 통해 그러한 소외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은폐시킬 수 있다. 상품 진열장에 눈이 멀고, 그를 얻기 위해 정해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말이다. 이에 힘입어 품은 경제를, 우리의 사회적 삶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이렇게 소외되고 파편화된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전부를 이 세계의 외양에 저당 잡히고서 사이비 인생을 살고 있다.

 

분리에서 통일로: 진정한 삶의 활동을 향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는 없는가? 이 사회에, 역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는가? 우리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직접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가?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스스로 구성할 수는 없는가?

분리를 은폐하며 그 위에서 통일된 외양을 띠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세계에서는 불만족스러움도, 불평불만도 단지 어설픈 부정이라면 그 자체가 새로운 상품이 되어버린다. 기획사의 철저한 상품화 전략으로 탄생한 저 ‘HOT’가 한국 교육의 현실을 개탄하고, 체 게바라에 대한 향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캐릭터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보라. 민주화를 외쳤던 70,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모습은 이제 시답지 않은 불평불만으로 매사에 시비를 거는 캐릭터로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 그 이후의 사람들 모두를 안방에 앉아 웃게 만든다. 비판적인 안목마저도 겉치레로 살아가기의 각본에 흡수되어 버리는 지금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서, 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이 역사의 주체로서 현실에 싸움을 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드보르는 실천이 아닌 사유로써만 분리를 극복하는 모든 사변적인 시도들을 거부한다. 그는 외부에 존재하는 행위자를 상정해놓고 관조하는 식의 헤겔 철학에 대해 맑스가 취하는 입장을 지지한다. 역사의 행로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설 수 있는 사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 질서를 부정할 수 있는, 혁명적 실천의 대열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행동과 유리된 지식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지식과 이론은 실천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강력한 입장이다. 이데올로기 주조기로 등장한 노동계급의 대표가 정작 노동계급과 분리되었던 현실 사회주의권의 역사를 비판하며, 드보르는 그러한 이데올로기 역시 결국 또 다른 스펙터클임을 선언한다. 또 하나의 허위의식, 전체주의적 허위성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맑스가 프롤레타리아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형태의 단계를 설정한 것에까지 그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맑스 주장대로 국가가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시녀가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하나의 주체적 행위자로 섰던 역사를 드보르는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억압기제계급, 국가에서 벗어나, ‘삶의 변두리가 아닌 삶의 중심부로 나아갈 수 있는 혁명적 실천의 선두에 직접적인 능동적 의사소통이 실현되는 장소인 노동자 평의회가 설 것을 주장한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통일된 상을 가질 수 있는 실천가로서 말이다.

 

드보르는 철이 없다?

그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1967년에 그 초판이 나왔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의 사상을 살펴보아야 타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동구권 몰락 이전, 또한 동양권의 왜곡된 역사읽기를 바로세우는 작업이 시작되기 이전의 드보르가 보이는 서구 유럽인으로서의 편견을 여기서의 관심사로 내세우지는 않겠다. 또한 계급혁명적 대안으로 인해, 그가 말하는 스펙터클이 단순히 계급분리를 은폐하는 기제라고 오해하는 것도 부당한 평가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직면하여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삶의 질의 최후의 보증자로서의 국가기구의 절실한 필요성 역시 드보르의 시절에 들이댈 수 있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그는 인간들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고, 분리되어 흘러가는, 결국 우리에게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뿌리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강요 받아 온 인간들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동질적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역사를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역사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가를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문을 던지면서, 드보르는 우리를 단순한 구경꾼으로 만들어놓은 기제인 스펙터클적 현실을 파헤쳐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띠건 간에, 그는 근본적인 혁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역사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어도, 상품세계가 던져주는 당근만을 받아먹고 사는 인간들이 과연 인간일 수 있는가를 물으며. 스펙터클의 물결에 개개인은 희생되고, 이제 어느 한 사람의 삶도 담아내지 못하는 역사는 그 자체 추동력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 그를 분개케 한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한 기만에 익숙한 채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그는 묻고 있다. 더욱더 그를 분개케 하는 것은 지식과 예술마저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자체의 논리대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이비 장() 속에서 인간들은 허위의식에 빠져, 그들의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그는 투쟁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내면에, 또한 세계의 기저에 존재하는 모든 허위의식을 도마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강력한 실천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부정을 바탕으로 하여 실천 속에서 우리의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는 자족하고 분리는 자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틈새와 만만함을 스펙터클적 조류에 노출시켜서는 안 됨을 주장하고 있다. ‘자아와 세계간의 경계진실과 허위 간의 경계를 없애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내가 철들어간다는 것이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오직 사랑과 믿음만으로 굳게 닫힌 가슴 열어내고

벗들을 위하여 서로를 빛내며 끝까지 함께 하리라.

(중략)

진짜 의리라는 게 무언지, 참된 청춘의 삶이 무언지

몇 마디 말 아닌 우리의 삶으로 기꺼이 보여 주리라.

-신세대 청춘송가(철철가) (윤민석 작사 작곡)

 

스펙터클적 현실 속에서 제공되는 질서와 긍정적인 세계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과 이질적인 길을 걷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고된 하루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를 보면서, 힘들었던 하루 일과 때문에 잠시 가질 수도 있을 불만을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시킴으로써 지워버리고, 다음 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해내는 삶. 같은 영화를 봤다는 사실로 일시적으로나마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대화의 장, 따져보니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의 고등학교 동창이고, 따져보니 이사 가기 전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피상적 관계가, 같은 고민을 나누며 서로의 삶에 동참해야 하는 관계보다 덜 짐스러울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들추어내기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자신의 능력을 쌓아서 연봉을 올리고, 그리하여 사회의 부조리로 인한 억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위치에로 상승하는 것이 보다 쉬운 삶일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이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부적응적인 삶을 비현실적이고 현학적인 비판으로 정당화시킨다는 비아냥에 상처받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자 누구인가.

 

현실 세계의 질서 안에서 철들기를 거부했던 드보르는 62세의 나이로 자살함으로써 그의 삶을 끝냈다.

 

자살.

 

공통언어 안에서 진정한 대화와 실천을 바탕으로 현실을 변혁시켜야 한다던 그였다. 역사에 반응하고 사회에 반응하고, 스펙터클적 조류에 도전해야 한다던 그였다. 대화를 하기엔 사람들과의 스펙터클적 관계가 너무나도 공고했던가? 도전적 반응을 보이기엔 스펙터클적 현실이 너무나도 멀리에 있었던가? 어쩌면 자살도 메시지를 건네는 이야기의 방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답변에 또다시 이야기를 건네기엔, 이미 그 대화의 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사회에 대한 부정성은 강력하고 끈질긴 실천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당근만 받아 먹고 사는 인생에서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걸어야 하는 길보다, 부정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긍정성을 구성하기까지 이르는 길이 더욱더 멀고 험난한 지도 모르겠다.

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아직 의문은 남아있다. 결국 우리는 현대산업에 그 생명줄을 걸고 있는 대중문화를 매개로 하여야만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인가? 더 이상 우리는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도, 가꿀 수도 없는 것인가? 뜬구름 잡는 인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서평교재: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스펙터클의 사회(서울: 현실문화연구, 1996)

The_Society_of_Spectacle.docx


『헤겔법철학비판』발제문 Young Marx writings


김세균,「맑스의 헤겔법철학비판에 대한 일고찰」 Young Marx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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